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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8. 18世 〉30. <태사공>금산초부휘돈석유사(金山樵夫諱墩錫遺事)
1. 문헌 목록 〉19. 19世 〉2. <요재공>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휘태신묘표(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諱泰新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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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재공>농암공휘세겸행장(聾庵公諱世謙行狀)
聾庵公諱世謙行狀 公諱世謙字恭潤雪弇其初號也玉川之趙系出高麗府院君諱元吉號農隱與圃牧陶治幷稱五隱典工判書瑛其一子也我 太宗朝屢徵以吏曹判書世子師傅不起累傳至參奉汝忠當龍蛇之亂檄倡義旅赴錦山戰斬獲居多錄宣武原從勳寔公八世祖高祖諱培有孝友德學錄靑襟案曾祖諱興玉祖諱元鎛考諱昌彦皆隱德不在妣丁氏錫福女以 正宗甲寅九月二十六日生公稟姿魁梧鬚垂過臍性孝養親惟志體是具雖身無全衣而便口之味莫不畢給前後丁艱皆哀毀三年葬山在家後東麓每日一展省服闋猶不廢旣省而歸坐必東面爲其考墓在東耳故至今人目其山曰趙莫東指嶝忌辰哀慟無異袒括必三日素而祭雖徵果亦不入口友于季方洙謙湛樂備至非有事岡或一日相離及公晩暮季方求異居不得巳乃中分其財而給之人皆謂此世亦有壁包平居未嘗短長人口無擇言而言必愼重行步必安詳雖急兩不迫衣冠必整齊非夜寐不脫律巳也斬斬接人也溫溫樂人之善而隱人之惡故賢者服其德而不賢者服其化當時人數淳化人物未嘗不於公而屈栂焉公早業功令自丙寅以降輒不復應擧改扁聾每春牕曉曙秋燈夜分常常誦其先祖忠獻公贈圃隱詩一句語病耳不堪聞世事滿川明月一簑衣盖以爲懷簡而杜門自靖計耳享年八十七以 太上庚辰十二月二十日考終壽階通政非公志也嗚呼公之孝友言行世不數數有也況吾東夷猾之 盖始于丙寅而極於今日若使公見今日則當早索兄於海之東山之西不應一聾默也巳推此志也亦豈不誠賢平哉宜乎佩一邑易望如當世衿式也以翌年二月葬雪山東三峰之乾坐會葬傾一郡配長興任氏宗源其父文獻公元順后生 正宗丁巳二十一年均檻村后子坐是其原有二男二女男廷烈廷三女適金洪根金元復曰機錫俊錫進錫長房孫曰榮錫亞房男淳奎壻許炳偰聖煥俊錫無育以族人子淳鶴後之進錫男淳洪淳京壻韓基采榮錫男淳杓淳南玄孫不盡載公沒三十有六年惜乎記述不以時其格言碩行頗多遺佚推托故老而相傳僮十一於千百也曾孫淳奎懼其愈久愈鏟俾炳記之炳於公亦曾孫壻也義不敢辭遂序次其足徵者如右以竢立言君子之採擇云爾 歲癸丑八月下休 詩山 許炳 謹狀 농암공휘세겸행장(聾庵公諱世謙行狀) 공의 휘는 세겸(世謙)이요 자는 공윤(恭潤)이고 설암(雪弇)은 그 초호(初號)라 옥천지조(玉川之趙) 계출(系出) 고려부원군(高麗府院君) 휘원길(諱元吉) 호농은인데 포은(圃隱) 목은(牧隱) 야은(冶隱) 도은(陶隱)으로 아울러 오은(五隱)이라 칭하였다. 전공판서(典工判書) 그 첫째 아들이다 태종대왕(太宗大王)께서 이조판서 세자사부로 불으셔도 종시 불기(不起)하셨다. 참봉 여충(汝忠)에 이르러 용사(龍蛇)의 난(亂)리를 당하여 창의(倡義) 의병을 모아 금산(錦山) 싸움에 순절하고 금산 종용사에 배향되였다. 공(公)의 팔대조요 고조의 휘 배(培) 효우덕행(孝友德行)으로 청금안에 기록되고 증조휘(曾祖諱) 흥옥(興玉) 조휘(祖諱) 원박이고 고(考)의 휘(諱)는 창언(昌彦)인데 다 은덕불사(隱德不仕)하시고 어머니(妣) 창원정씨(昌原丁氏) 정종(正宗) 갑인 구월 이십 육일생(甲寅九月二十六日生)이시다. 공(公)은 품성이 총명온후(聰明溫厚)하여 문학으로 병세하시와 은덕 불사(不仕)하시고 효행(孝行) 부모님께 떨어진 옷과 입에 맞지아니한 음식(飮食)은 드리지 아니하시고 아버지 상(喪)을 당하시와 슲음으로서 삼년상을 여묘(廬墓)하시고 장사는 집뒤 동쪽에 뫼시고 날마다 정성으로 비와 바람을 피하지 않고 성묘하시고 집에 앉으면 동쪽 아버지 산소를 돌아본고로 세상 사람이 조모(莫趙)동지등이라 칭하고 매양 기일(忌日)이 돌아오면 목욕재계하시고 수 과실 하나라도 입에 넣지 안하셨다 아우수겸과 우애담락(友愛湛樂)하시와 하루라도 떠나지 않다가 말년에 부득히 분거할때 재산을 반으로 갈라들이니 사람이다 이르기를 설포와 같다하고 바듯이 심중하지 않는자는 상대치 아니하시고 순화인물이라고 칭하다 병인왜변(丙寅倭變)으로 세상사를 귀로 듣지 않기로 호 설암을 농암으로 고치고 문밖출입을 아니하셨다 선조(先祖) 농은부군(農隱府君) 증포은 시왈(詩曰) 병이불심문세사 만천명월일사의(病耳不堪聞世事滿川明月一簑衣)다시 고쳐 병이든 귀 세상일을 들을 수 없고 강물에 가득찬 달빛이 도롱이 비추네 시를 읊으며 망국의 한을 다 이미 을사보호 조약에 의해 우리 나라가 일본의 수중에 들어간것을 안 그는 자신의 호를 바꾸고 처신했다. 그리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몸가짐을 단정이하고 남을 대할때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성을내지 않고 온화한 마음으로 대했다 이렇게 지내다가 九十七세로 세상을 떠나니 훗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증직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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